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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 없는 지방 창업은 정말 ‘맨땅에 헤딩’일까요?
– 사람 중심 경제가 지역을 살리는 방식
서울에서의 창업은 이미 하나의 공식처럼 굳어져 있습니다.
투자 유치, 브랜드 인지도, 인맥 네트워크, 그리고 빠른 확장입니다.
반면 지방에서 창업은 흔히 이렇게 불립니다.
“맨땅에 헤딩”입니다.
거대한 자본도 없고, 이름값 있는 브랜드도 없으며,
시장을 연결해 줄 인맥조차 없는 상태에서 시작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많은 청년들은 지방을 떠나 서울로 향하고,
지역은 “기회가 없는 곳”이라는 인식 속에서 점점 비어갑니다.
하지만 이 공식이 반드시 진실일까요?

놀랍게도, 진짜 흙을 밟으며 시작한 지역의 작은 시도들이
돈보다 ‘신뢰’, 기술보다 ‘관계’를 중심으로
지역 경제를 되살리고 있는 사례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 중심에는 공통된 키워드가 있습니다.
바로 ‘사람 중심 경제’입니다.
1. 전북 완주 – 돈보다 신뢰가 먼저 흐르는 경제 구조
전라북도 완주는 한때 “청년이 떠나는 농촌”의 전형이었습니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2010년대 초반까지 완주는
청년 인구 순유출이 지속되는 지역 중 하나였습니다.
농업은 고령화되었고, 농산물은 중간 유통 구조 속에서
농민에게 남는 것이 거의 없었습니다.
이 구조를 바꾸기 위해 완주군이 선택한 전략은
‘대규모 투자 유치’도, ‘외부 기업 유치’도 아니었습니다.
유통 구조 자체를 지역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
즉 관계를 설계하는 일이었습니다.
완주군은 전국 최초로
‘지역 먹거리 직매장’과 ‘먹거리통합지원센터’을 구축했습니다.
핵심 원칙은 단순했습니다.
생산자는 실명으로 판매합니다
농민이 직접 가격을 결정합니다
유통 거리를 최소화합니다
수익은 다시 지역 안에서 소비되도록 연결합니다
이 구조에서 소비자는 단순한 구매자가 아닙니다.
“누가 만들었는지 아는 먹거리”를 선택하는
지역 경제의 참여자입니다.
실제로 완주 로컬푸드 직매장은
개장 초기 하루 매출 수백만 원 수준에서 시작해
현재는 연 매출 수백억 원 규모로 성장했습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돈의 크기'보다 ‘돈의 방향’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한 농부가 지역 먹거리 판매장에서 하루 10만 원을 벌면
그 돈은 대형 유통사를 거쳐 사라지지 않습니다.
지역 협동조합에서 자재를 사고,
지역 정비소에서 차량을 수리하고,
지역 카페와 식당에서 소비됩니다.
이렇게 같은 10만 원이 지역 안에서 여러 번 순환합니다.
이를 경제학에서는 ‘지역 내 승수 효과’라고 부릅니다.
이 구조가 자리 잡자
청년들에게도 변화가 생겼습니다.
완주에는 ‘로컬 청년 창업센터’와
농촌형 창업 지원 프로그램이 생겼고,
도시에서 내려온 청년들이 농업을
‘생산’이 아닌 ‘기획 산업’으로 바라보기 시작했습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로컬 허브를 재배해 천연 화장품을 만드는 청년 팀입니다.
이들은 대기업처럼 광고비를 쓰지 않습니다.
대신 생산 과정, 농부의 이야기, 지역의 맥락을 콘텐츠로 만듭니다.
소비자는 단순히 화장품을 사는 것이 아니라
“이 지역의 순환 경제에 참여한다”라는 감각을 구매합니다.
완주는 이렇게 증명했습니다.
돈보다 관계가 먼저 흐를 때,
지역 경제는 스스로 움직이기 시작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2. 통영 – 산업의 붕괴를 문화로 전환한 도시
경남 통영은 오랫동안 조선업에 의존해 온 도시였습니다.
하지만 조선업 침체와 함께
대형 조선소들이 문을 닫자
도시는 급격히 쇠퇴했습니다.
문제는 단순한 일자리 감소가 아니었습니다.
도시의 정체성 자체가 사라질 위기에 놓였습니다.
통영시가 선택한 해법은
“새로운 공장을 유치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버려진 공간과 사람을 다시 연결하는 것이었습니다.
폐조선소 부지를 활용해 조성된
‘작은 유니버스 창작촌’은
그 상징적인 사례입니다.
이곳에는 회화 작가, 금속 공예가, 디자이너,
사진작가, 요리 연구가 등
30여 개 팀이 입주해 있습니다.
이들은 단순히 작품을 전시하지 않습니다.
버려진 철판으로 조형물을 만들고
폐목재로 가구를 제작하며
작업 과정 자체를 공개합니다
방문객은 “관람객”이 아니라
창작 과정에 참여하는 소비자가 됩니다.
이 구조를 가능하게 만든 것은
지방정부의 역할이었습니다.
통영시는
‘로컬 문화산업 육성 조례’를 제정해
예술가에게 실질적인 지원을 제공했습니다.
임대료 최대 70% 지원합니다
지역 정착 시 세제 혜택을 제공합니다
작품 판매 수익 일부를 지역 문화 기금으로 환원합니다
이는 단순한 보조금 정책이 아닙니다.
문화가 지역 경제 안에서 순환하도록 설계한 구조입니다.
그 결과 통영은
“관광지”가 아니라
“창작이 일어나는 도시”로 인식되기 시작했습니다.
청년 창업 비율은 3년 만에 두 배 가까이 증가했고,
예술가를 따라 디자이너, 영상 제작자,
로컬 식음료 창업자들이 모여들었습니다.
통영의 사례는 말합니다.
지역 경제는 반드시 공장으로만 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문화와 이야기로도 충분히 재생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3. 인공지능 시대, 일자리는 사라질까요
– 인간이 ‘상사’가 되는 미래입니다
이제 시선을 미래로 돌려보죠.
많은 이들이 묻습니다.
“AI가 일자리를 모두 빼앗는 것 아닙니까?”
하지만 해외 사례는 다른 답을 보여줍니다.
▶ 핀란드 – AI를 ‘도구’로 배우는 교육
핀란드의 초등학교에서는
AI를 ‘코딩 과목’으로 가르치지 않습니다.
대신 AI 시뮬레이션 게임을 활용합니다.
아이들은 AI 농장 시뮬레이터에서
로봇에게 농사를 맡깁니다.
하지만 로봇은 스스로 판단하지 않습니다.
날씨 변화가 발생합니다
병충해가 생깁니다
시장 가격이 변동합니다
이 모든 조건을
아이들이 분석하고 전략을 세웁니다.
즉 아이들은
“AI처럼 일하는 법”이 아니라
“AI를 판단하고 지시하는 법”을 배웁니다.
▶ 독일 – 로봇의 직원이 아닌, 관리자
독일은 ‘산업 4.0’ 정책 아래
새로운 직업군을 국가 자격으로 지정했습니다.
산업 로봇 운영자입니다
AI 유지보수 기술자입니다
스마트 공정 매니저입니다
직업학교에서는
로봇이 오류를 일으켰을 때
그 원인을 분석하고 수정하는 능력을 평가합니다.
한 독일 교사의 말은 이 모든 것을 요약합니다.
“우리는 아이들을 로봇의 직원으로 키우지 않습니다.
미래 공장의 매니저로 키웁니다.”
완주는 관계로 경제를 살렸고,
통영은 문화로 도시를 재생했으며,
핀란드와 독일은 사고력으로 미래를 준비했습니다.
이 모든 사례가 공통으로 말하는 것은 단 하나입니다.
성장은 기술이나 자본이 아니라,
사람을 어떻게 연결하느냐의 문제입니다.
돈보다 신뢰가 중요하고,
기술보다 상상력이 필요하며,
속도보다 방향이 중요한 시대입니다.
자본 없이도 지역은 살아남을 수 있고,
인공지능 시대에도 인간은 중심에 설 수 있습니다.
관계 중심 경제가 항상 성공하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이러한 지역 사례들이 언제나 순조롭게 진행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중요한 사실은, 로컬 경제 실험의 상당수는 초기 단계에서 실패를 경험했다는 점입니다.
이 실패를 어떻게 견뎌냈는지가 오늘의 성공을 만들었습니다.
먼저 로컬푸드 직매장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은 전국적인 성공 사례로 알려진 완주 역시
초기 2~3년간은 지속적인 적자를 기록했습니다.
매대에 물건이 남아 폐기되는 날도 많았고,
농민들 사이에서는 가격 책정과 출하 물량을 두고 갈등이 반복되었습니다.
특히 어려웠던 부분은
“누가 더 많이 팔았는가?”가 아니라
“누가 손해를 감수했는가?”에 대한 문제였습니다.
어떤 농가는 인기 품목으로 빠르게 수익을 냈지만,
다른 농가는 판매가 부진해 불만을 제기했습니다.
이때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행정도, 시장도 아닌 중재자였습니다.
완주군은 공무원, 협동조합 실무자, 지역 활동가를 중심으로
농민 간 갈등을 조정하는 회의 구조를 만들었고,
가격 기준과 출하 원칙을 수차례 수정하며 합의를 끌어냈습니다.
즉 완주의 성공은
처음부터 잘 설계된 모델의 결과가 아니라,
갈등을 조정하는 과정 자체를 포기하지 않은 결과였습니다.
통영의 예술 창작촌 역시 비슷한 길을 걸었습니다.
현재 주목받는 공간 이면에는
예술가 유치에 실패한 장소들이 분명히 존재했습니다.
입주자가 오래 머물지 못하고 떠난 공간,
관광객의 발길이 거의 닿지 않았던 시기 또한 있었습니다.
초기 통영의 문제는 단순했습니다.
공간은 마련했지만,
그 안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협업할지에 대한
구체적인 관리와 지원이 부족했던 것입니다.
이후 통영시는 정책 방향을 수정했습니다.
단순히 작업실을 제공하는 데서 나아가
입주 예술가 간 협업을 중재하고,
지역 주민과 연결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기 시작했습니다.
행정의 역할도 “지원자”에서
사람을 관리하고 관계를 조율하는 조정자로 바뀌었습니다.
이 변화 이후에야
예술가들은 지역에 정착하기 시작했고,
창작촌은 관광지가 아닌 생활 공간으로 기능하게 되었습니다.
이 두 사례가 공통으로 보여주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관계 중심 경제는 자동으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돈보다 신뢰가 중요하지만,
그 신뢰는 시간이 필요하고,
누군가가 끊임없이 중재하지 않으면 쉽게 무너집니다.
관계 경제는 빠른 성과를 내지 못합니다.
갈등이 생기고, 효율이 떨어지며,
외부에서 보면 비합리적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느린 과정이 쌓여야만
지역 안에 지속 가능한 경제 구조가 만들어집니다.
결론 – 성장은 결국 사람에서 시작된다
결국 지역 경제를 살린 핵심은
“사람이 착해서”가 아니라
사람 사이의 갈등을 관리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사람 중심 경제란
갈등이 없는 경제가 아니라,
갈등을 포기하지 않고 조정하는 경제입니다.
진짜 경쟁력은
혼자 앞서가는 힘이 아니라
함께 순환하는 힘입니다.
그 힘을 가진 지역과 사람은
어떤 위기 속에서도
자기만의 길을 만들어냅니다.